심영숙의 좋은 땅 / 꽃기린과 핑크공주
저는 손이 엄청 차갑습니다.
그래서 겨울이면 따뜻한 찻잔을 감싸 잡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으로 전해지는 찻잔의 따뜻한 온기가 참 고맙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뜨거운 커피잔을 한참, 안고 있다가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삭막했던 제 방 사무실에 화분이 가득합니다.
작년 늦가을 복지관 한 모퉁이에 있는 우리만의 정원에서 봄, 여름, 따뜻한 계절을 보내고, 겨울을 나기 위해 화분들이 제 방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식물을 좋아하는 저를 배려해서 우리 복지관 부장은 분갈이와 가지치기로 화분을 예쁘게 단장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화분을 잘 관리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화분이 제방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어른들이 좋은 이사 날을 선정하는 것처럼 저도 내심 언제쯤 내방으로 데리고 올까.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얼지는 않을까 조바심을 떱니다. 또 봄이 오면 언제쯤 밖으로 보내면 좋을까를 생각하며 설렙니다. 빨리 햇살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바깥 정원으로 보내었다가 꽃샘추위에 혼난 적도 있습니다.
겨울 동안 실내로 들어온 화분은 계절의 감각을 잊어버린 채, 따뜻한 내 방에서 뾰족한 새순을 내밀기도 하고 서둘러 꽃을 피우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 녀석들을 볼 때면 얼마나 신기하고 예쁜지요.
작년 화분들이 이사 오는 날과 비슷한 시기에 우리 복지관 오뚝이 교실에 한 친구가 들어왔습니다. 오뚝이 교실의 막내입니다. 올 3월에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 친구니까 아직은 뽀송뽀송한 꼬마 친구입니다. 이 친구도 추운 겨울을 피하여 잠시 오뚝이 교실로 이사를 왔나 봅니다.
첫날 꼬마 친구를 소개받는 날이었습니다.
“민주(가명)야 관장님이야. 앞으로 인사하고 지내자.”라는 담당 선생님의 소개에 웃음은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한겨울 추위에 잔뜩 몸을 움츠리듯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올겨울 저에게는 두 개의 행복한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내 방의 화분을 잘 관리하는 것과, 민주에게 웃음을 찾아주는 일, 어쩜 둘 다 비슷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심스레 사랑이 답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며칠 동안 손도 잡아보고 장난도 치면서 민주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느 날 그 꼬마 친구를 꼭 한번 안아보고 싶었습니다. “민주야 관장님이 한번 안아봐도 돼.” 꼬마 친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부터 우리의 인사는 포옹이 되었습니다. 한날은 중요한 사무 전화를 받고 있는데 민주가 들어왔습니다. 눈인사를 나누고 공부방으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민주는 내 전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의 인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따뜻한 포옹을 나누고 공부방으로 갔습니다.
민주는 분홍색을 참 좋아합니다. 온통 핑크입니다. 위아래 옷은 물론이고 장갑과 마스크까지 모두가 핑크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은 핑크공주라고 부릅니다.
사무실 화분 중에 꽃기린이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이 나무는 작년에 제 방에 들어올 때부터 꽃을 피운 채 들어왔는데, 겨울 내내 빨간색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작은 꽃이 참 예쁩니다. 약간은 핑크빛을 내면서도 빨간 색깔의 꽃이 이 겨울을 이기고 있어 애처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예쁜 꽃과는 달리 그만의 무기가 있습니다. 장미꽃보다 더 억센 가시가 있습니다. 꽃을 잘 못 건드렸다가는 온 손에 가시 세례를 받을 지경입니다. 우리 핑크공주를 닮았습니다. 핑크공주도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핑크 속에 꼭꼭 숨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핑크 속에 숨겨진 비밀은 가시로 도배를 하고 빨간 꽃으로 승화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부터 작은 웃음을 찾은 우리 공주는 제법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잘 표현합니다. 지난 설에는 엄마랑 백화점에 가서 아이슬라임을 샀다고 자랑을 합니다. 아이슬라임?? 혼자 몰래 검색어를 찾아보면서 우리 공주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니다.
이제는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그 친구만의 똑똑한 자태로 오뚝이 교실에 당당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친구 준우가 내 방문을 노크합니다. 준우는 책상에 위에 있는, 허브식물을 한번 쓱 쓰다담고 향기를 음미하고 공부방으로 갑니다. 처음에는 이게 뭐냐고 묻길래 한번 만져보라고 했더니 허브향에 빠져 버렸나 봅니다. 거의 매일 허브를 신나게 쓰다듬고 갑니다.
오늘이 벌써 입춘이라고 합니다. 멀지 않아 내방 화분들도 바같세상으로 이사를 보내야 할 까 봅니다. 이쁘다고 혼자만 독차지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마다의 색깔이 있는 우리 아이들, 저들도 언젠가는 바같세상으로 나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꽃기린이 꽃과 가시로 어우러져 자신의 예쁨을 자랑하듯, 우리 핑크공주도 당당한 자존감과 때로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배 같은 오뚝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온 세상이 허브향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손이 차갑습니다. 따뜻한 찻잔이 필요한 계절입니다. 우리 꽃기린과 핑크공주님, 좀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남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