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숙의 좋은 땅 / '소풍 끝내는 날'

2025-03-04     뉴스메이트(newsmate)
    심영숙 /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장

우리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으셨다.

가을이 되면 싸리나무로 마당 빗자루를 만드시고, 수수 대로 방 빗자루를 만들어서 도시에 살고 계시는 친척들에게 선물로 나눠 주곤 하셨다. 워낙 꼼꼼하신 성격이라 수수대를 얇은 철사로 꽁꽁 묶어 만들어 놓으면 멋진 빗자루가 완성된다. 시중에 팔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빗자루의 용도가 그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봄의 소리가 들린다. 벌써 3월이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가끔 기분 전환 겸 다녀오는 곳이 청도이다. 가깝기도 하지만 감말랭이랑 곶감을 좋아해서 청도 일대를 한 바퀴 돌다가 길옆에 감 파는 곳이 있으면 잠시 주차를 하고 감말랭이 한 통을 사들고 온다. 며칠 동안 나의 달콤한 간식으로 안성맞춤이다.

아직은 묵직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조만간 팍 터트리고 나올 것 같은 나무들이 침묵의 시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만의 성급한 판단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내 눈에는 곧 새순이 돋아날 것만 같았고, 노란 개나리가 피어날 것만 같았다.

멀지 않아 학교에서는 봄 소풍을 가게 될 것이다. 요즘은 워낙 현장학습을 많이 나가서 소풍이라는 개념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어릴 때는 1년에 두 번 봄가을 소풍을 갔었다. 그때가 되면 혹시 비가 오면 어쩌나 조바심을 떨면서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소풍 가는 날이었다. 아마 그때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솔직하게 지금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도 남을 만큼의 일이 있었다. 어제께도 우리 집 세 자매가 오랜만에 모여서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 빠른 막내동생은 또 ‘그 이야기다.’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소풍 가는 날, 엄마가 김밥을 싸주셨는지, 간식은 뭘 가지고 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고집도 세고, 책임감도 강했던 나는 중2 때 학급 반장을 맡고 있었다. 소풍을 가니까 당연히 선생님의 간식을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부모님께 선생님 간식을 사 가야 되니까, 돈을 달라고 했다. 시골에 살면서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닌 것 확실했지만, 그래도 가난한 줄 모르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는 최선을 다해주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정도의 돈은 주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돈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냥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난 선생님께 빈손으로 가는 것이 죄송하고 싫었다. 끝까지 문 앞에 서 있으면서 돈을 달라고 졸랐다. 보다 못한 우리 아버지, 그 명품의 빗자루를 드셨다. 아마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빗자루가 나의 어깨를 쳤다. 아뿔싸 아픔은 둘째고 빗자루를 단단히 묶고 있던 철사가 교복에 걸리면서 기역자로 찢어지고 말았다.

소풍날 아침, 선생님 선물도 없이 울면서 학교로 갔다.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다만 나는 그 찢어진 교복을 졸업할 때까지 입고 다녀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 선물값이 얼마 한다고 그걸 주시지 못했는지 의문이지만, 아마 모르긴 해도 아버지한테는 단돈 10원도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이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그 돈을 주시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아마 마음이 찢어지지 않았을까.

그 후에 일은 기억이 없다. 다만 그 일로 나는 아버지를 원망한 일도, 미워한 일도 없다. 그냥 아픈 추억 하나만 쌓여 있을 뿐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우리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시는 날이었다.

그때 나는 몹시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 밤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두 눈을 크게 뜨신 아버지께서 “영숙아 나 이제 3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분명 꿈속이었는데도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병실에 시계를 보았는데 새벽 1시였다. 꿈이려니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올케언니의 전화였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새벽 4시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3시간 전에 나의 병실을 찾아오셨고, 그 길로 영원히 내 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그때 일을 사과하러 오셨을까. 아니면 아픈 딸이 끝내 마음에 걸려 나의 병실까지 찾아오셨을까.

천상병 님의 「귀천」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가서 아버지 만나면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서 감사하고

가난했지만

하얀 찔레꽃 따 먹고, 보라색 감자꽃밭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시절이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