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숙의 좋은 땅/ '다리'

2025-04-15     뉴스메이트(newsmate)
                                        심영숙/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장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학교에 가려면 마을 어귀에 있는 큰 강을 건너야 했다. 지금은 멋진 콘크리트 다리가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돌다리를 건너서 가야 했다.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돌다리는 다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때마다 등굣길 강가에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나오셔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건네주셨다. 가끔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덕분에 학교에 갈 수 없어 무지 좋아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우리 집에는 걷지 못하는 주인의 다리를 보조해 주는 물건들이 많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휠체어다. 그것도 한 대도 아니고 두 대이다. 한 대는 실내에서 타는 것이고 다른 한 대는 실외용이다.

밖에서 타고 다니는 휠체어를 집까지 타고 들어오면 바닥은 금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휠체어가 움직이는 곳마다 화가가 유연한 붓놀림을 하듯 제목을 알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때부터 동생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그래도 어쩌랴. 한 발짝도 걷지 못하는 내게 휠체어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다리이다.

나의 다리가 어찌 휠체어뿐이겠는가.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나는 좌식 생활을 했다. 그때는 집이 좁아서 휠체어를 타고 다닐 공간이 없었다. 엉덩이를 밀고 다녔다. 팔만 뻗치면 모든 물건이 잡히는 좁은 공간 덕분이기도 했다.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입식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침대가 들어왔다. 하지만 나의 장애는 침대에 올라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휠체어와 침대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생기면서 그 간격을 넘을 수가 없었다.

잠깐 같이 살았던 조카가 어느 날 선물이라면서 기막힌 물건 하나를 들고 왔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제재소에 가서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토막을 하나 만들어왔다. 휠체어와 침대를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되었다. 나의 다리가 하나 더 생겼다.

그 나무다리도 세월을 이길 수가 없었다. 닳아서 가루가 떨어지고 곧 부러질 것만 같았다. 조카는 멀리 호주로 떠나 버렸고, 속사정을 이야기할 만한 사람을 찾았다. 마침,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생각났다. 그에게 부탁했더니 크기가 다른 나무를 여러 개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어느 지인께서 쌀 한 포대를 보내주셨다. 그걸 받아 들고는 부자가 된 것 같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나무다리를 받아 들고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나무다리는 또 한차례 난간을 만났다. 집에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몽땅 없어졌다. 잘 챙기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보통 사람에게 그건 한낱 나무토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난 잊어버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던 공사업자는 아무 생각 없이 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출장 가면 그 숙소에서 사용하려고 차 트렁크에 하나 실어 둔 게, 있어서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네 삶에는 참으로 많은 다리가 있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어버리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그 다리를 대신해야 하는 수많은 다리가 필요했다.

휠체어 타는 방법을 몰라서 수없이 떨어지고 넘어졌다. 그때마다 달려와 도와주었던 사람들, 그들은 눈물의 다리였다.

어렵게 직장을 잡고 출근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따뜻한 다리가 되어주었다. 계단이 있는 식당으로 가야 할 때, 고속버스를 타고 연수를 가야 할 때 그때면 누군가에게 업히거나 안겨야만 갈 수 있었다.

꽃 가마를 탈 때도 있다. 앞에서 두 명, 뒤에서 두 명,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면 꽃가마가 된다.

‘꽃가마 탔으니 시집가야겠네요’. 라는 농담이 나의 미안한 마음을 덜어준다.

앞으로 남은 삶 동안 얼마나 더 많은 다리를 건너야 할까.

언젠가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다리를 건너야 할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는 데는 아무 기약이 없으니, 순간순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겠다. 받은 사랑이 너무 많다. 그래서 다 갚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영화 국제시장에서 황정민씨가 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서 했던 그 대사를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

그 다리를 넘어 다음 삶에는 엄마가 물려준 두 다리로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