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숙의 좋은 땅/ "초코파이와 정(情)”

2025-08-26     뉴스메이트(newsmate)
                    심영숙/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장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는 구멍가게조차 없는 산골이었다. 오남매 중 맏이였던 언니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일찍이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가끔 집에 내려올 때면 언니는 늘 작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코파이였다.

그 시절, 초코파이는 내게 동화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신기한 과자였다. 엄마는 늘 그 초코파이를 어디엔가 숨겨두셨다. 아버지께 드리려고 그러셨는지, 아니면 우리가 한꺼번에 다 먹을까 봐 그러셨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때 초코파이는 마법의 과자였고, 속에 들어 있던 하얀 마시멜로는 요술처럼 달콤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 나는 중구지역의 한 복지관에서 일한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구지역에는 지역아동센터가 5곳이 있다. 매년 중구청에서는 지역아동센터 아이들 중 초등학생 100여 명이 모여 독서 골든벨 및 명랑운동회를 연다. 금년에도 방학을 이용하여 중구 청라체육센터에서 대회가 열렸다.

주최 측에서 작년에 1등 상품이 약했다는 평이 있었나 보다. “관장님, 혹시 올해 1등 상품 하나 후원해 주실 수 있으세요?”라는 전화가 왔다. 예산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큰마음 먹고 최신형 태블릿 PC 한 대를 후원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근무하고 있는 법인에도 지역아동센터가 있다. 작년에 1등을 우리 센터 아이가 받아왔다. 당연히 올해도 우리 아이들이 받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근히 담당 선생님께 압력을 주었다. “최신형 태블릿을 후원했으니까, 아이들 공부 좀 시켜서 꼭 상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이다.

행사 당일, 우리 센터 아동들이 복지관에 모여 함께 출발했다. 담당 선생님과 아이들은 행사장으로 가기 전 사무실에 들러 인사를 했다. 혹시 긴장해서 떨어질까 봐 속마음과는 달리 “재미있게 풀고 오라”고 격려하며 보냈다.

골든벨은 시작되었고, 담당 선생님은 문자로 중계해 주었다. 초반에는 아이들이 잘 풀고 있다고 했다. 한 문제, 한 문제를 풀 때마다 신나서 보내는 선생님의 문자가 TV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잠시 후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이 와중에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칠판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라는 볼멘 문자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관장님 사랑해요♡”라고 써 놓은 정민이였다.

그 자리에 내가 있던 것도 아니고, 출발할 때 눈길 한번 마주치지 못했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나의 선생님이다.

무엇이 참 교육인지 잊어버리고 1등만 바라던 나에게 참교육을 가르쳐 준 건 아이들이었다. 1등 상은 다른 지역아동센터로 돌아갔지만, 아이들은 1등보다 더 큰 선물을 내게 주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오늘 나는 두 손 들고 옥상에 올라가 벌을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고 지칠 때 가끔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전해주는 그 한마디는 모든것을 이기고도 남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그 누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지, 못 한다.

오늘, 생각지도 못한 꼬마 친구에게 들었던 그 말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보는 공식 석상에서. 증거 사진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결국 나는 그 사진을 카톡 프로필 대문 사진으로 저장해 두었다.

며칠 뒤, 나는 정민이를 내 사무실로 불렀다. 혼자 들어온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장난기가 발동해 “정민아, 너 관장님께 잘못한 거 없어?”라고 물었다. 심각해진 아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때 말했다. “사실은 관장님이 너한테 작은 선물 하나 주려고 불렀어.” 그리고 초코파이 한 통을 내밀었다.

초코파이 상자에 적힌 ‘情’이라는 글자가 크게 가슴으로 안겨 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는데. 우리 아이들과 그렇게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데. 아이들은 내가 바라는 그 이상을 선물로 준다. 예쁘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언니에게서 받았던 그 맛은 아닐지라도, 우리 아이들 기억 속에 ‘情’으로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