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숙 /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장
     심영숙 /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장

지난 주말 한강 작가의 어른을 위한 동화 '눈물상자'를 읽었다.

글 속에 꼬마 친구가 어느 날 눈물을 수집하는 아저씨에게 자기가 흘린 눈물이, 아저씨가 찾는 순수한 눈물이냐고 질문을 한다. 그때 아저씨의 대답이 큰 위로가 되는 주말이었다.

한 달 전부터 초등학교 밴드에 동창회 모임이 공지되었다. 참가를 알리는 친구들의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누가 참석할까. 밴드만 훔쳐보다 끝내 댓글을 달지 않고 나와 버렸다.

사실 일주일 내내 출근하고 좀 쉬고 싶은 주말에 그것도 늦은 저녁 시간 외출은, 게으른 내게는 보통 이상의 결심을 해야 한다.

잘 참석하지도 않을 거면서 허풍을 떨었으니 미안한 마음이다. 친구들과 개별적 만남이 주어지거나, 통화를 할 때면 당장이라도 뛰어갈 것처럼 “동창회 안 하니”라면서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정녕 동창회 공지를 보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회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영숙아 너 동창회 안 오나?” “응 가야지 갈게”라면서 약속을 했다.

며칠 전 둘도 없는 가까운 동창이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검지 손가락 한마디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시리게 아팠다. 미안하고 아파서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사고 나서 평생 걷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 부모 형제도 하지 못하는 사랑을 주었던 친구였다. 재활할 때까지 나의 다리가 되어주었던 친구, 그 친구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아마 오늘 밤을 꼬박 세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 그의 사고 소식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그날이었다. 고민고민하다 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몸살 기운도 있고 해서 오늘 못갈 거 같다. 미안해.” 하얀 거짓말을 했다.

“진짜로!!! 니 온다고 어제 하루 종일 화장실 청소 다 해놓고 경사로도 만들어 두었는데.”

모임 장소가 회장 사무실이었다. 식당에서 모이기에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워서 자기네 사무실에서 하려고 준비를 해두었다는 것이다.

병원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했다.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 넘어 친구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감사하다는 것이다. 손가락을 잃었는데 뭐가 감사한지 항상 바보같은 친구다. 그러니까 나 같이 부실한 친구랑 함께 해주겠지.

“오늘 동창회 날인데.” “아~ 맞다. 대신 가서 찬조 좀 해 줄래~~”라고 한다. 얼마 전 딸 결혼식 때 와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것이다.

화장실 청소 해두었다고 큰소리친 친구도 그렇고, 찬조금을 부탁한 친구도 그렇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늦은 토요일 오후, 친구의 사무실에는 동창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푸짐한 음식들이 상다리를 휘게 한다. 주문한 음식도 많은데, 된장찌개까지 실력 발휘한 친구의 정성이 대단하였다.

학교 다닐 때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린 모두 시골 출신의 작은 초등학교 졸업생들이다.

어느 해 겨울, 지금의 전기 히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솔방울로 교실 앞에 난로를 피울 때였다. 난로 위 천장에 '불조심'이라는 팻말을 걸어 두었는데, 친구 한 명이 새총으로 그걸 맞추겠다고 쏘다가 친구를 맞추어서 한바탕 난리가 난 일이 있었다. 추억 속의 한 장면이다.

대머리가 되어있는 친구도 있고,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머리가 훨씬 더 많아진 모습이지만 다들 멋진 사회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잘 살아가는 모습이 좋다. 지금보다 더 잘 되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 먼저 집으로 가야겠다고 나오는데 사무실 뒤편 앵글로 만든 자그마한 붙박이가 있었다. 무슨 구멍가게도 아닌데 과자도 있고, 라면도 있고 정이 담긴 초코파이도 있었다. 오징어 땅콩 한 봉지를 슬쩍 들고나왔다. 근데 웬 가게야? 라는 질문에 친구의 말이 정겨웠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가끔 사무실에서 자는데 저녁에 배고프면 먹으라고 마련해 둔 거란다. 그걸 내가 먹겠다고 한 봉지 들고 왔으니. 나는 얌체고, 친구는 착한 사장님이었다.

“화장실 안 가나? 너 온다고 얼마나 열심히 청소해 두었는데.” 그냥 집으로 오려고 했는데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친구의 성의를 생각해서 화장실로 휠체어를 돌렸다. 어설픈 경사로가 있긴 했지만, 화장실 입구부터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폭이 아니었다.

마음과는 달리 아직은 장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친구에게 서서히 알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상자 아저씨는 꼬마 친구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순수한 눈물이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는 눈물을 말하는 게 아니야. 모든 뜨거움과 서늘함, 가장 눈부신 밝음과 가장 어두운 그늘까지 담길 때 거기 진짜 빛이 어리는거야.

오히려 네 눈물에는 더 많은 빛깔이 필요한 것 같구나. 특히 강인함 말이야. 분노와 부끄러움, 더러움까지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 ”

우리의 아픔, 슬픔, 희로애락이 담겨 있어야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손가락 한마디를 잃어버린 친구도 있고, 외국인 근로자의 야식까지 챙기는 사장님도 있고, 걷지 못하는 친구까지 인간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그들이 순수라는 생각에 행복한 주말이었다.

바보 같은 친구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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