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영숙아.평생을 추억의 아름다운 아이였을 영숙이가 새로 태어난 모습으로 내 곁에 나타났다.심봉사가 청이를 맞이하듯 너의 손을 잡았다.세월의 벽을 넘어 그때의 모습이조금 확대되었다는 생각과,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만났다는 것 외에는 감정의 큰 변화는 없었다.나를 찾아 준 너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담임 시절 다 주지 못한 사랑을 찾아서 주고 싶구나. 너가 있어 내 삶이 더 아름답다. — 2003년 6월 16일, 선생님이」작년 여름,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가끔은 생각한다. 휠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내가 살던 시골 동네는 구멍가게조차 없는 산골이었다. 오남매 중 맏이였던 언니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일찍이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가끔 집에 내려올 때면 언니는 늘 작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코파이였다.그 시절, 초코파이는 내게 동화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신기한 과자였다. 엄마는 늘 그 초코파이를 어디엔가 숨겨두셨다. 아버지께 드리려고 그러셨는지, 아니면 우리가 한꺼번에 다 먹을까 봐 그러셨는지는
이번 달 책 선정은 김서현샘이 고른 책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서현샘의 블로그 닉네임(빛나는 똑똑이)이 먼저 떠 올랐고, 다음으로 든 생각은 “요즘 서현샘이 많이 힘든가.”라는 생각이었다. 늘 반짝이고 싶어 노력하는 친구인데 어떻게 하지. 라면서 책을 펼쳤는데 그 힘듦을 고려하는 건, 후 순위로 미루어졌고 책의 문장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마디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최소한 내게는 서울대 교수, 나태주 시인의 딸, 어느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은 글이었다.작년 연말에 복지관에서 발송하는 연하장 인사말을 쓰면서 나태주 시인의 시구를 인용
벌써 한 해의 반이 흘러갔다.우리나라 박지성선수가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이야기다. 그는 “하프타임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후반전을 이기기 위한 작전타임”이라고 했다.6월 마지막날, 하프타임이 끝나는 시간이다.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잘 가느냐고 묻는다. 물론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한 해의 반이 흐르기도 했지만, 나의 삶을 봤을 때도 반을 훌쩍 넘겼다.내가 우리 복지관에 갓 입사했을 때였다. 행사를 마치고 직원들과 함께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갔었다. 식당에 들어서는데 그 당시 나의 선임
주일 아침이다. 일찍 눈을 떴다.동생은 아직 자고 있나 보다. 방문이 고이 닫혀 있는 걸 보니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덜거덕 소리를 내며 아침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얼마 전 너의 딸 결혼식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하얀 드레스에 눈꽃처럼 예쁜 딸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너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단다.결혼식 한 달 전쯤 딸이랑 예비 사위를 데리고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었지. 오랜만에 너랑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눈에는 너의 딸과 사위보다 네가 훨씬 크게 보였단다. 물론 일 년 전쯤 숙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잠깐 보긴
함께 살던 동생이 출장을 갔다.출근 준비를 하기 위하여 세면장으로 가다 동생 방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미 떠나고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서로에게 참 무심하다. 방문이 열려있으면 나갔나 보다. 라고 생각한다. 지난밤 짐을 꾸리는 소리에 몇 번 깨긴 해지만 이렇게 일찍 떠난 줄은 몰랐다. 방문이 열려있었다. 평소에도 나보다 일찍 출근하기에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오늘 아침은 다르다. 집이 휑하니 뭔가 허전하다.며칠 전 동생이랑 한바탕했다. 언니가 오이소박이김치를 담아서 두 통을 가지고 왔다. 한 통을 다 먹고 난 뒤, 다른 한 통을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연휴다. 어린이날, 석탄일까지. 쾌재를 부르면서 이 시간에 책 한 권을 읽고 글 두 편을 써야지.라는 목표를 세우고 출발했다.토요일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고, 어제 주일은 예배드리고 언니랑 차 한잔하고 들어오니, 또 하루가 흘러가 버렸다.내일 하루가 남긴 했지만, 오늘도 벌써 반나절이 지나갔다. 어제 언니가 찌짐 구워 먹으라고 두릅나물을 주었다. 그냥 두면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생명을 다하지 못할 것 같아 아침 일찍 서둘렀다. 서툰 솜씨에 찌짐을 부치고 나니 벌써 10시를 넘어섰다.아까운 시간을 부여잡을 수도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학교에 가려면 마을 어귀에 있는 큰 강을 건너야 했다. 지금은 멋진 콘크리트 다리가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돌다리를 건너서 가야 했다.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돌다리는 다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때마다 등굣길 강가에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나오셔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건네주셨다. 가끔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덕분에 학교에 갈 수 없어 무지 좋아했던 기억도 선명하다.우리 집에는 걷지 못하는 주인의 다리를 보조해 주는 물건들이 많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휠체어다. 그것도 한 대도 아니고 두 대이다.
수동휠체어를 타고 다닐 때였습니다.거의 매일 휠체어를 밀고 다니니까 손바닥에 굳은살이 쌓여서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갈라지고 딱딱할 때가 있었습니다.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과 악수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전 제 장애보다 더 부끄러웠던 것이 저의 손이었습니다. 한창 예쁘고 부드러워야 하는 아가씨의 손이 차돌 만지듯 딱딱하니 부끄러워서 손 내밀기가 여간 싫은 게 아니었습니다.세월이 흘러 전동휠체어가 나오고, 수동휠체어를 탈 일이 많이 줄어들어서 굳은살이 많이 없어졌습니다.얼마 전 어느 행사장에서 타 장애인복지관 관장님과 악수할
한 달에 오만 원만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어느 주일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본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분과 마주쳤다. 외나무다리였는지 오작교였는지 모르지만, 본당 올라가는 길목 중앙에서 우리는 만났다.“심영숙 씨 혹시 아르바이트 한번 해보실래요?” 그분의 질문이었다.어제저녁까지 한 달에 오만 원만 벌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무슨 아르바이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나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시는 그분이 주시는 일이라면 지하에라도 쫓아갈 수 있었다.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장애를 만나고 얼마 되지
우리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으셨다.가을이 되면 싸리나무로 마당 빗자루를 만드시고, 수수 대로 방 빗자루를 만들어서 도시에 살고 계시는 친척들에게 선물로 나눠 주곤 하셨다. 워낙 꼼꼼하신 성격이라 수수대를 얇은 철사로 꽁꽁 묶어 만들어 놓으면 멋진 빗자루가 완성된다. 시중에 팔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빗자루의 용도가 그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봄의 소리가 들린다. 벌써 3월이다.지난 주말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다녀왔다.가끔 기분 전환 겸 다녀오는 곳이 청도이다. 가깝기도 하지만 감말랭이랑 곶감을 좋아해서 청도 일대를 한
지난주 화요일 오후 시간이었다.오전에 복지관에 행사가 있어서 정신없이 바빴다. 2백여 명의 어르신을 모시고 정월 대보름 찰밥 나눔 행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관장실을 가득 메웠던 내빈들도 다 가시고 조금은 조용한 시간이었다.한숨 돌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직원들을 포함하여 오뚝이 친구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내 방 사무실이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모르는 분 같아서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마스크를
오전 11시, 외부 회의가 있어서 사무실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외근 준비를 서둘렀다. 회의 장소가 지하철역 근처이기도 하고, 주차 공간도 협소해서 차를 버리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하철로 향했다.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그 장애로 인하여 또 다른 장애를 동반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대부분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서두르는 편이다. 어느 날은 지하철을 타려고 엘리베이터로 갔는데 그날따라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 수리를 하고 있었다. 비장애인 같으면 다른 출구로 나가면 되는데, 휠체어 장애인은 엘리베이터 외에는 다른 접근 통로가
제 핸드폰에는 이름도 성도 없는 번호들이 두 개 저장되어 있습니다.몇 해 전 제 생일 때였습니다. 요즘은 SNS에 생일이 뜨니까 지인들로부터 축하 문자가 몇 통 날라 왔습니다. 그중에 한 분의 문자는 이름도 없이 발신자가 「옆집」이었습니다. 옆집?? 누굴까. 한참을 생각하면서 몰래 설레었던 기억이 납니다.어느 해 여름날 저녁,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아파트의 단점 중의 하나가 아니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 냄새가 배어서 현관문을 열어두었다가 닫는 걸 잊어버리고 그냥 자버렸습니다. 한밤중에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
저는 손이 엄청 차갑습니다.그래서 겨울이면 따뜻한 찻잔을 감싸 잡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으로 전해지는 찻잔의 따뜻한 온기가 참 고맙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뜨거운 커피잔을 한참, 안고 있다가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삭막했던 제 방 사무실에 화분이 가득합니다.작년 늦가을 복지관 한 모퉁이에 있는 우리만의 정원에서 봄, 여름, 따뜻한 계절을 보내고, 겨울을 나기 위해 화분들이 제 방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식물을 좋아하는 저를 배려해서 우리 복지관 부장은 분갈이와 가지치기로 화분을 예쁘게 단장해서 데리고 왔습니다.따뜻한 봄이 올 때
겨울의 중턱, 아마 이맘때쯤이었나 봅니다.겨울방학, 초등학교 시절 세 자매의 시골 아침 풍경이 생각납니다.시골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저는 오 남매 중 세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언니랑 오빠는 나이 터울이 많아서 함께 했던 기억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래 여동생 두 명은 세 살 터울이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시골집이라 위풍이 세기도 했지만, 엄마가 아침을 차려 올 때까지 세 자매는 이불 속에서 서로 따뜻한 곳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이불을 잡아당기다 결국 싸움이 터지
2023년 봄,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세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있었습니다.“지선아 사랑해”의 주인공 이지선 교수 이야기입니다. 23살 때 교통사고로 온몸의 55%를 화상을 입고, 40번이 넘는 수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재활하여 그해 봄, 졸업 후 23년 만에 모교인 이화여대 교수로 발령을 받으면서 연일 매스컴의 세례를 받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 뭉그러진 자신의, 몸을 보게 되면서 “엄마! 내 몸과 엄마 몸 바꿔 줄 수 있어?”라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할 수만 있다면 천 번이고 만
지난 주말 한강 작가의 어른을 위한 동화 '눈물상자'를 읽었다.글 속에 꼬마 친구가 어느 날 눈물을 수집하는 아저씨에게 자기가 흘린 눈물이, 아저씨가 찾는 순수한 눈물이냐고 질문을 한다. 그때 아저씨의 대답이 큰 위로가 되는 주말이었다.한 달 전부터 초등학교 밴드에 동창회 모임이 공지되었다. 참가를 알리는 친구들의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누가 참석할까. 밴드만 훔쳐보다 끝내 댓글을 달지 않고 나와 버렸다.사실 일주일 내내 출근하고 좀 쉬고 싶은 주말에 그것도 늦은 저녁 시간 외출은, 게으른 내게는 보통 이상의 결심을 해야 한다.잘
우리 복지관에는 독서 모임이 있다. 비록 몇 명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벌써 2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도 탈락한 직원도 있지만, 꾸준히 참여하는 직원들 덕분에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참 감사한 모임이다.이번 달 책 선정은 내 차례였다. 그동안 자기개발서를 많이 읽어 와서 이번에는 문학책을 한번 읽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정한 책이 피천득님의 수필집이었다.아마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인연이라는 수필은 그 당시 나를 매료 시키기에, 충분했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은 시절 그의 수필 속에서
장영희 교수님의 글 중에서 한 예화를 옮겨봅니다.「거센 폭풍우가 지나간 바닷가에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들이 백사장을 덮었다고 합니다. 한 어린 소년이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남자가 소년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이제 곧 해가 뜨면 불가사리들이 죽게 될 테니까 하나씩 바닷속으로 던져 넣는다고 했습니다.남자는 크게 웃으며 해변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불가사리들이 있는데 네가 하는 일이 도움이 되겠느냐고 소년에게 물었습니다.잠시 생각에 잠긴 소년은 다시 불가사리, 한 마리를 바닷가로 던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