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핸드폰에는 이름도 성도 없는 번호들이 두 개 저장되어 있습니다.
몇 해 전 제 생일 때였습니다. 요즘은 SNS에 생일이 뜨니까 지인들로부터 축하 문자가 몇 통 날라 왔습니다. 그중에 한 분의 문자는 이름도 없이 발신자가 「옆집」이었습니다. 옆집?? 누굴까. 한참을 생각하면서 몰래 설레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해 여름날 저녁,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아파트의 단점 중의 하나가 아니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 냄새가 배어서 현관문을 열어두었다가 닫는 걸 잊어버리고 그냥 자버렸습니다. 한밤중에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옆집인데요. 현관문이 열려있는데 닫아 드릴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잠결에 “아~~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음날 인사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번호를 저장하려는데 이름도 성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장한 이름이 옆집이었습니다. 바보처럼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생일날 보내준 문자에 잠시 설렘의 기쁨을 안고 행복했습니다.
사실은 얼마 전 복도에서 만나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꼼꼼하지 못한 나는 번호를 저장해 두지 않았는데, 옆집은 제 번호를 저장하셨나 봅니다.
어느 해 늦가을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신천대로에서 내려 우회전 후 큰 도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앞차를 쾅 박아 버렸습니다. 사고는 언제나 그렇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침착은, 어디로 줄행랑을 쳤는지, 콩닥거리는 마음을 부여잡았습니다.
빨리 차에서 내려 앞차 주인에게, 사과를 드려야 하는데 도로에는 차가 쌩쌩 달리고 있어 휠체어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깜빡이만 켜고 멍청이 차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앞차 주인께서 제 차로 오셨습니다.
TV 드라마에서만 보아왔던 사실들이 이제 내 앞에 펼쳐지기 직전입니다. 뒷목을 잡고 오셔서 큰소리치는 남자분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반말하면서 운전 똑바로 못하느냐고 큰소리치는 사람~~~
무조건 내 잘못이니 어떻게든 참으리라, 마음을 다잡고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건 뭘까요. 가끔 느끼는 일이지만 항상 천사가 제 뒤를 따라다니나 봅니다. “혹시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뒤쪽에 오는 차 본다고 앞차를 못 보셨죠.” 생각지도 못한 다정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운전 좀 똑바로 하세요.” 최소한 이렇게는 말씀하셔야지 제가 덜 미안할 텐데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장애인이어서 휠체어를 내릴 수가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라는 궁색한 인사에 그렇지 않아도 장애인 마크를 보고 알았다면서 보험회사로 전화하라는 안내까지 해주었습니다.
보험회사가 올 때까지 옆길에 대기하고 계시다가 모든 처리가 끝난 뒤 “조심하세요.”라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급하게 불렀습니다. 죄송한데 전화번호라도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진짜 전화번호만 주시고는 떠나셨습니다. 이름도 성도 없는 그분의 전화번호 이름은 「사고」였습니다.
며칠 전 대구에도 제법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아침에 출근한다고 나왔는데 온 세상이 하얗고 우리 집 아파트 입구도 제법 얼어있었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지각한 직원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멀리서 온 직원은 아침 7시에 출발했다고 하는 데 10시가 다 되어서 도착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도로 곳곳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빙설이어서 사고가 났겠지만, 그 가운데도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벌써 몇 해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의 사고로 경제적, 심리적 힘듦이 있었지만, 길 위에서 멋진 스승 한 분을 만났습니다. 최소한 다음에 나도 반대의 경우가 생긴다면 힘들어하는 가해자에게 어떤 배려를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분, 그분이 눈 내리는 그날 불현듯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도 죄송하고 고마워서 차라도 한잔 대접 해드리고 싶다고 훗날 전화를 드렸지만, 타지에 살고 있다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모바일로 작은 선물을 보내드렸더니 구구절절 고맙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어제 주말 저녁 우연히 핸드폰을 만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옆집」님의 생일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생일선물 쿠폰을 보내 드렸는데 이내 ‘깨톡’이라는 알림과 함께 답장이 왔습니다. “감동입니다~~~”
두 분에게 나는 어떤 이름으로 번호가 저장되어 있을까. 저에게 두 분은 「옆집」과 「사고」로 저장되어 있지만 천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