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외부 회의가 있어서 사무실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외근 준비를 서둘렀다. 회의 장소가 지하철역 근처이기도 하고, 주차 공간도 협소해서 차를 버리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하철로 향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그 장애로 인하여 또 다른 장애를 동반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대부분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서두르는 편이다. 어느 날은 지하철을 타려고 엘리베이터로 갔는데 그날따라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 수리를 하고 있었다. 비장애인 같으면 다른 출구로 나가면 되는데, 휠체어 장애인은 엘리베이터 외에는 다른 접근 통로가 없다. 꼼짝없이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런 유사한 일들이 종종 있어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약속 시간을 서둘러야만 한다.
그날도 일찍 출발했다. 하지만 항상 변수는 많다. 철로에 도착하니 방금 차는 출발 해버렸고, 지하 3층에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눈앞에서 올라가고 있고, 게다가 화장실까지, 회의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서둘러 지하 1층에서 지상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질주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를 외쳤더니 안에서 누군가가 잡아주었다. 그게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냥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었는데 내가 잘못했나. 아니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도 누군가가 오면 보통은 기다려 주는 게 예의가 아니던가.
가끔은 난 바보 같기도 하고 눈치도 없다. 그래서 누가 내 욕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익숙 하지가 않다.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에는 나한테 하는 이야기인 줄 전혀 몰랐다.
어쩜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셔서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해서 인사하느라 분위기 파악이 안 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희한한 소리에 잠시 나의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출근 시간이 늦었는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지. 바쁜데 밖에는 왜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개나 소나 다 밖으로 튀어나온다. 등등”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씩씩거리는 소리가 내 머리 뒤통수에서 들려온다.
한참을 듣다 보니 나한테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욕설을 쏟아내는 한 여인의 소리에 미안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신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밖에서 잠깐만을 외치면서 전동휠체어로 달려오는 나를 보면서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러주신 어르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눈빛 속에 내게 미안하다는 듯 웃으면서 나를 보고 계셨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이라 휠체어를 돌릴 수가 없어서 난 그 여인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내리니까 벌써 어디로 가셨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나민애 교수의 ‘반짝이지 않아도 사랑이 된다.’라는 에세이집에서 그녀의 글 한 편이 생각났다.
<나만의 비밀 방공호>라는 글이다. 핵전쟁이 나면 방공호를 찾아가야 하듯 그녀는 마음속에 종종 핵폭탄이 터져서 분진이 날리고 방사능이 터지만 그녀만의 비밀 방공호인 시를 찾아 도피한다고 했다. 슬프면 더 슬픈 시로 도망가고, 남이 더럽고 치사하게 굴면 깨끗하고 더 치사한 시에게 놀러 간다라고 했다. 거기서 훌훌 털고 묻고 버려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오늘은 나만의 비밀 방공호를 찾아야겠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직원들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마음속에 꽉 막힌 감정을 표출했다. 직원들의 반응은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또 다른 직원은 ‘그런 사람을 가만뒀어요.’ 한 직원은 제가 부들부들 떨립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라면서 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화가 남아서 혼자 볼멘소리를 해본다.
“저런 사람이 근무하는 회사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저런 사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그렇게 바쁘면 택시를 타고 가지.
엘리베이터는 노약자를 위해서 설치한 건데 바쁘면 계단으로 가면 되지.
휠체어 탄 사람은 밖에도 나오면 안 되고 집에만 있어야 하나~~”
어지러운 마음이 며칠 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개도 아니고 소도 아니다. 그냥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좀 다른 인간이다.
굳이 동물로 따진다면 난 그 유명한 말띠다. 그것도 백말띠. 알지도 못하면서.
한참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나만의 비밀 방공호를 찾았다.
이쯤 되면 그 여자분에게, 감사를 해야 하나. 드디어 그날의 일을 나의 글 속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돌이켜 생각하면 만약에 내가 그 여자분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 여자분에게 따지고 언쟁을 벌였다면 아마 내 글 속에 그녀를 올리지 못했을 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분이니까, 편하게 내 비밀 방공호로 모시고 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잘 참고 넘어가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비밀 방공호에 들어오니 그 여자분에 대한 미운 마음은 이미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다만 지금 내가 속상한 건 그 여자분은 어디 가고 나만의 비밀 방공호가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무딘 칼을 갈고, 파인 도마를 단장해서 방공호를 예쁘게 꾸미고 싶다.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니 속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