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오만 원만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느 주일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본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분과 마주쳤다. 외나무다리였는지 오작교였는지 모르지만, 본당 올라가는 길목 중앙에서 우리는 만났다.
“심영숙 씨 혹시 아르바이트 한번 해보실래요?” 그분의 질문이었다.
어제저녁까지 한 달에 오만 원만 벌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무슨 아르바이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나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시는 그분이 주시는 일이라면 지하에라도 쫓아갈 수 있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장애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생리대를 살 돈이 없었다. 매달 그날이 오면 생리대를 사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난 한 달에 오만 원이라도 벌고 싶었다.
그분은 부장판사였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학교를 졸업하시고 최고의 성적으로 사법고시를 합격한 분이다. 감히 옆에 있는 것조차 황송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제게 주신 아르바이트는 편지 쓰기였다. 그 무렵 그분은 부장판사를 사직하시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셨고, 많은 사건을 맡으시면서 그중에 수인들에게 전도 편지를 보내는 일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그것은 일종의 공부였다.
그분이 주시는 아르바이트를 6년 정도 한 거 같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어떤 분이나 상관없이 내가 편지를 보내고 싶은 분에게 보내면 된다고 하시면서 매달 꼬박꼬박 돈을 보내주셨다. 아마 나의 생활을 도와주시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였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언니 집에서, 독립했고 대학을 졸업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 언니네 아파트에서 살 때 나는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 교회에 가려면 2층 계단을 누군가에게 업혀서 내려와야 했다. 당연히 나의 외출은 제한적이었고 나의 하늘은 언제나 네모였다. 아파트 창문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네모 틀에 갇혀서 넓은 세상을 담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12평 영구임대아파트는 천국이었다. 친구의 주선으로 생전 처음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보금자리로 얻었을 때, 평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을 나서면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휠체어 경사로가 있어서 혼자 외출을 다닐 수가 있었다.
그 작은 아파트를 누가 훔쳐 갈세라, 밤이면 거센 폭풍우가 나의 아파트를 삼켜버리는 꿈을 꾸곤 했다.
12평 영구임대아파트는 나에게는 대궐이었다. 가까운 지인들을 모시고 집들이를 했다. 당연히 그분을 초대했다. 그분은 비누값이라면서 봉투 하나를 주셨는데 깜짝 놀랐다. 아마 내 평생 수표를 처음 보았던 것 같다. 무슨 비누값이 비누 가게를 통째로 살 수 있는 돈이었던 것 같다.
그분에게 받은 것은 경제적 지원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복지관에 입사할 때였다. 30년 전쯤이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였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에게 취업의 문을 열어주는 곳은 거의 없을 때였다. 게다가 신생복지관에 장애인을 직원으로 채용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가 ‘아니오’라고 했을 때 그분은 우리 법인의 이사님으로 계시면서 ‘예’를 해주셨다. 한번 채용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그만두게 해도 늦지 않다고 다른 인사위원들을 설득하셨다고 훗날 누군가에게 들었다.
삶의 곳곳에 그분께서 주신 사랑은 말로 다 표현이 안 된다.
대학원 졸업하면서 석사논문을 들고 찾아갔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고, 덕분에 학위까지 받았다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였다. 그분은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과 축하 파티를 한번 하자고 하셨다. 철없던 나는 20명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했다. 아마 그렇게 고급스러운 식당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돈 벌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식당에서 꼭 대접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뒤, 내가 부장이 되었을 때 우리 법인에 다른 부장 두 명이랑 그 식당으로 갔었는데 음식값이 너무 비싸서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분은 10년 전, 그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갔으니, 돈을 얼마나 쓰셨을까.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저께 그분 팔순 생신이었다. 가까운 지인 몇 명이랑, 청도 어느 식당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했다. 아직도 변호사로 활동하고 계신다. 젊은 시절 그렇게 많이 베푸시고 나누셨으면서도 얼마나 검소하시고 겸손하신지 배우고 또 배워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분이다.
“오늘 넘치는 축하를 받았습니다. 왜 이리 쑥스러운지요. 너무 많이 받아서 크게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심관장 팔순 때 갚을게요. 고마워요. 언제나 평강을~~”이라는 문자가 왔다.
그분께서 주신 게 얼만데 작은 생신 파티로 고맙다고 하시니 참 부끄럽다.
“지금까지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옆에 계시는 것만으로 너무 든든합니다.
최근 며칠 생각하니 건강하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10년 뒤도 지금처럼 건강 하시길 기도드립니다.”라고 답장을 드렸다.
10년 뒤 구순 때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밥과 차 한잔 나누었으면 좋겠다.
살아오면서 받은 사랑이 너무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갚을 수가 없다.
윤동주 님의 시처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감사히 걸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