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1월 1일에 칠면조에게 먹이를 준다. 1월 2일에도 먹이를 준다. 1월 3일도, 1월 4일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12월 23일, 12월 24일에도 먹이를 준다. 그러니 그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매일 칠면조에게 먹이를 줄 것이라고 추측된다. 칠면조도 그 사람이 계속하여 자기에게 먹이를 주니 참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 사람은 칠면조를 잡아 그 고기로 파티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먹이를 주는 그 사람은 ‘칠면조인 나를 위한’ 오랜 친구였지만, 한순간에 그 믿음은 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 믿음은 단 한 번의 배신으로 지금까지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에 충분한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표현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기도 한다. 내 아이가 어릴 적 컵에 든 우유를 쏟았을 때, 나는 무심코 “잘~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꾸중으로 한 말이 아이한테는 칭찬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기억이 있다.
잘못한 것을 잘했다고 표현하는 이런 것이 바로 ‘역설’이다. 사전에 나오는 뜻으로만 본다면,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인터넷에 그 예를 찾아보았다. 가난한 억만장자, 작은 거인, 소리 없는 아우성, 성공한 실패, 우둔한 천재, 침묵의 소리, 역겹지만 즐거운 이야기, 노브랜드 등 매우 다양했다.
또, “상품 장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광고효과는 감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논리적 인식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 때 바로 나타나는 것이 역설이라는 낱말의 의미다. 광고와 관련하여 어떤 패스트푸드 체인이 ‘건강을 위해 패스트푸드 식당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것도 그런 범위에 속할 것이다.
‘감자의 역설’도 있다. 수분 함량이 99%인 감자를 건조시켜 수분 함량을 98%로 낮추려고 하면, 즉 1% 정도의 수분을 낮추기 위해서는, 그 감자의 수분을 절반쯤 빼내야 한다고 한다. 계산을 해보면 전체 수분의 49%가 줄어들었음에도 그것이 단 1%만 결과로 난다는 것이다. ‘역설’이 틀림없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소개되고 있다.
‘고장난 벽시계’라는 유행가가 있다. 고장나서 멈춰 있는 아날로그 벽시계는 하루에 두 번은 반드시 맞는 시각을 표시하게 된다. 하루는 24시간이므로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씩 시계가 멈추어 있는 그 시각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항상 틀린 말만 하던 사람이 웬일로 옳은 말을 했을 때 쓰는 비유적 표현으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다”와 비슷한 뜻으로,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었을 뿐인데 우연히 맞는 말을 한 경우에 쓰이는 하나의 ‘역설’이다.
최근에는 ‘풍요의 역설’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이 자원이 없는 나라들보다 오히려 경제 성장률이 낮고 빈곤율이 높은 현상이라 한다. 자기 나라의 자원이 풍부하다 보니 산업이나 인적 자원 등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게 되고, 그런 결과가 결국 국가 경제력이 떨어지고 경제 발전이 더디어지게 되는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각국에서는 우울증 발병률은 지극히 낮다고 한다. 가난할수록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문제를 겪는 확률이 적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니까 우울증이라는 것은 서글프게도 풍요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풍요할수록 우울해진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야간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불빛 한 점 없는 흙투성이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우울하다고 하는 것이니까, 풍요한 생활이 반드시 좋은 것만이 아닌 셈이다. 경제성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경제적 수준이 더 이상 삶의 질이나 행복과 비례하지 않거나 혹은 반비례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확신하며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과거보다 더 살기 힘이 든다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역설’과 마주하고 있다. 건전한 삶과 행복이라는 것은 물질적 풍요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적당한 부족함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교훈을 준다. ‘칠면조의 역설’에서처럼, 과거에 그러했기 때문에 현재나 미래가 그럴 것이라는 맹목적 신념을 가질 것이 아니라 ‘풍요의 역설’에서처럼 약간의 부족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매일을 살아야 할 것이다.